일본 열도에서 인간과 철이 만난 것은 야요이 시대 중기라고 알려져 있으며, 야요이 시대 중기 후반에는 철소재를 수입하면서도 국내에서의 원시적인 철기 생산이 시작되었습니다.
「다타라제철」의 진보
「이즈모 풍토기」에 등장 — 철 생산으로 인해 확대되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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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모 풍토기」의 이이시(飯石)지역에 대한 기술에서는「하타 강에는 철이 있고..」라는 대목이 있으며, 니타(仁多)지역에 대한 기술에서는 「이상의 지역에서 나오는 철이 단단하여 여러 물건을 만들기에 적합하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는, 강에서 사철을 채취한 것과 여러 지역에서 제철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헤이안 시대의「정사요략 政事要略」에는 이즈모, 호키, 빈고, 비츄 지역은 지대(地代)를 철이나 곡괭이로 내도록 정해져 있는데, 이를 통해 이 지역들이 고대의 철 산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세의 다타라―「다카도노 다타라」와 「산나이」의 형성
용광로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제철설비를 갖춘 건물을 「다카도노 高殿」라고 합니다. 대규모 설비를 갖춘 다카도노로 인해 지속적인 제철작업이 가능해졌으며, 이로써 「산나이」라는 기술자들의 취락이 형성되었습니다.
다카도노에는 4개의 기둥(오시타테바시라)이 있으며, 규모가 큰 다카도노는 그 높이가 약 18미터에 달합니다. 내부에는 목탄과 사철이 쌓여있고, 벽 쪽에는 각 장인들의 자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다카도노의 중앙에는 길이 약 3미터 정도의 상자형 용광로가 놓여 있고, 좌우의 풀무에서 각각 약 20개의 송풍관이 용광로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습기를 막고 용광로 내부의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도코쓰리」라는 지하구조가 있습니다.
당시의 다카도노로서는 현재 운난시 요시다초의「스가야 다타라」가 남아있으며, 그외 각 문화관에는 재현모형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메이지 시대~쇼와 시대 ― 벽돌 용광로에 의한 사철제련
일본에서의 서양식 제철은 안세4년(1857)에 「오하시 일번 용광로(이와테현 가마이시시)」가 완성됨으로써 시작되어, 메이지27년(1894)에는 서양식 제철방식이 다타라 제철의 생산량을 능가하게 됩니다.이 시기에는 다타라제철도 송풍시설과 성형 작업에도 동력을 사용하거나, 벽돌 용광로를 개발하는 등 생산성 향상에 매진했습니다. 벽돌 용광로는 내열 벽돌을 이용해 높이 쌓아올린 용광로로, 원료로 사철(또는 슬래그),연료로 목탄을 이용하여 종래의 다타라제철에 서양식 용광로 기술을 도입한 것입니다. 전통적 다타라제철이 다이쇼시대에 막을 내린 후에도 벽돌 용광로는 특수강의 원료인 목탄선을, 쇼와 40년(1965)년까지 공급했습니다. 다타라 벽돌용광로 전승관(오크이즈모)에서는 사쿠라이 가(家)가 경영했던 마키하라 다타라에 쇼와 10년(1935)에 건설된 벽돌 용광로와 주변시설을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습니다.
다타라의 구조 변화와 전파 – 시대와 지역에 따른 다타라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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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타라의 지하구조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며 또한 비밀로 부쳐졌습니다. 중세의「노다타라*장소를 옮겨가며 용광로를 설치해 철을 생산하는 방식」는 근세의 「다카도노 다타라」에 이르기까지 바뀌어 왔는데, 크게 배수구 형태의 구조가「고부네」로 바뀌고, 돌을 깐 것과 제습용 관(管)이「도코쓰리」구조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기술적 변화의 일례를 노다타라와 그후에 만들어진 다카도노가 함께 남아있는 오크이즈모초의 온지제철유적(현 지정 사적)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